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彼得)와 한글 구약성경 번역 이야기 ① | 성서한국, 54권2호(2008.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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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은 언제 누가 처음으로 우리 한국어로 번역했을까? 특히 한글개역 구약성경은 언제 누가 어떻게 우리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을까? 구약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역사는 1898년, 알렉산더 피터스(이하 피터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국역사(舊約國譯史)에서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년 12월 30일 출생 -1958년 6월 29일 별세)가 1898년에 번역하여 출간한 『시편촬요』는 구약 국역의 효시(嚆矢, '우는 화살' : 온갖 사물의 맨 처음을 비유하는 용어)를 이루었고, 피터스는 구약 국역의 선구자가 되었다(김중은, "구약 국역의 선구자 알렉산더 피터스“, 구약의 말씀과 현실, 한국성서학연구소, 1996, 61-76쪽). 피터스는 러시아 에카테리노슬라브(Ecaterinoslav,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상업을 하는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향에서 1888년에 고전 |
인문고등학교(classical gymnasium)를 졸업한 후, 그 당시 심한 경제난과 미래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그는 고향집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으로 향했다. 외국으로 가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시베리아 철도부설 노동자로 취직하기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타러 일본 나가사키에 오게 된다. 피터스는 나가사키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1895년 4월 7일 주일 아침에 그 곳에 있는 교회에 찾아가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피터스는 예배를 드린 후 화란 개혁교회 선교사로서 일본에서 사역하던 그 교회의 피터스(Albertus Pieters) 담임목사를 만났으며, 자원하여 그에게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4월 19일 저녁 피터스 목사의 사택에서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이 개종을 하면 그의 성을 바꾸는 것이 관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직 알렉산더 피터스의 유대인 본명을 알지 못한다. 그는 세례 받은 후 그의 이름을 그에게 세례를 베푼 나가사키의 피터스 목사의 이름(성)을 따라 개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총무는 유대인 청년 피터스가 세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을 알고 그를 만났다. 4월 21일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가려는 피터스에게 루미스 총무는 미국 성서공회가 파송하는 권서(勸書, colporteur)로서 피터스가 한국에 가서 일하기를 제안했다.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였고, 피터스는 영어를 배우면서 그해 5월 16일 부산과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만 24세의 미혼 청년 피터스는 곧장 한국어를 배우면서 서울 근교에서 권서활동을 시작했다. 피터스가 한국에 도착한 1895년의 한국어성경번역의 상황은 1887년 이후 소위 로스역 신약전서가 출판되어 있었으나, 아직 구약 성경번역은 나오지 않았다. 1885년 언더우드(h.g.underwood)와 아펜젤러(H.G. Appenzeller) 선교사를 선두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내한하기 시작한 이래, 1893년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 (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The Bible Committee of Korea)"가 조직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공인번역위원회(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만들어 본격적인 성경 국역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공인번역위원회는 먼저 신약번역에 착수하여 기존의 로스역 신약전서를 대체할 신약전서를 1906년에 확정하여 출간했다. 피터스가 한국에 온 1895년에 구약 국역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 멀게만 느껴졌다. 피터스는 1895년 5월부터 1898년 6월까지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루미스 총무의 관할 아래 한국에서 권서의 일을 열심히 했다. 권서로서 활동하면서 피터스는 당시 한국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읽기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구약이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 구약성경이 공인번역위원회를 통해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권서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편을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 결과 피터스가 시편 중에서 발췌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시편촬요가 1898년 말에 출간되었다. 그동안 피터스는 미국성서공회의 권서 직을 사임했고,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대영성서공회(BFBS) 지부로 옮겨서 1898년 7월부터 1899년 말까지 부총무 겸 권서로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편촬요가 구약 국역의 효시로서 출간된 경위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첫 성경번역에 관해 피터스 자신이 쓴 글에 잘 나타나 있다(Alex. A. Pieters, "First translations", The Korea Mission Field, May 1938, 91-93쪽). 그 글에서 시편촬요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섭리로 예수를 믿게 되고, 미국성서공회의 권서로서, 나는 1895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성서위원회가 신약을 번역하고 있었고, 구약이 앞으로 번역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을 알았다. 어려서부터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매일 히브리어 기도서를 읽고 시편의 아름다움과 영감을 맛보면서 암송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최소한 시편 중에 얼마라도 번역해 주고 싶었다. 저주시편을 빼고 시편의 절반정도의 분량을 번역하는데 약 1년이 걸렸다. 한국어를 잘하는 네 분 선교사에게 번역원고를 보여드리고 인정을 받았다. 1898년에 출간된 시편촬요는 8년 동안 유일한 한국어 구약 역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시편촬요는 1898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약 2500부가 당시 서울의 감리교 삼문출판사를 통해 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편촬요는 가로 18센티미터 세로 12센티미터이고, 순전히 국문으로 인쇄되었으며, 모두 65쪽의 분량이다. 시편의 절반가량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시편 150편중에서 62편만을 골라 수록하고 있다. 박용규는 시편촬요의 출간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편찰요는 출판되자마자 수요가 폭발했다. 곧 매진되었다. 루미스의 말을 빌린다면, 수요를 다 감당치 못할 정도였다. 마가렛 힐스가 지적한 대로, ‘그것(시편촬요)은 1911년 구약에 사용된 시편번역에 공헌했다.''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 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셩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 1895-1911" ,평양대부흥 100주년기념 알렉산더 피터스 선교사 조명, 서울 내곡교회와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51쪽). 한편 피터스는 시편촬요를 출간한 이후 성경(특히 구약) 번역자로서 선교사들의 격려와 주목을 받았다. 그는 1899년 대영성서공회 서울 지부에서 일하던 자리를 사직하고, 1900년 1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맥코믹 신학교에 3년간 재학하는 동안 피터스는 1901년에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선교사로 지원하고 있었다. 피터스는 1902년 엘리자벳 캠벨(Elizabeth Campbell)과 결혼하고, 피터스 선교사 부부는 1904년 5월 16일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피터스가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루미스는 한국에서 구약번역을 하는데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해 미국성서공회본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피터스야말로 구약번역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라는 의견이 중론입니다‥‥ 나는 그가 구약번역을 완성하도록 허락되기를 희망하며, 어떤 다른 사람이 수정하거나 통일하여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터스를 준비시켜 오신 듯 보입니다.“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 상게서, 59-60쪽에서 재인용함). 피터스는 한국에 도착하여 미 북장로회 서울 남부지역 선교구를 맡아서 전도와 교회개척, 사경회 인도 등에 전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1906년 1월에 피터스는 첫 부인과 사별하게 된다. 그 해에 피터스는 공인번역위원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구역시대 초기부터, 특히 구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원전을 읽는 실력이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족한 구약번역 위원을 충원하기 위해 1906년 10월 3일부터 크램(Willard Gliden Cram, 1875-1969, 奇義男)과 피터스가 공인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1907년 말까지 레이놀즈, 크램, 피터스 3인이 구약번역을 추진해 나갔다. 1907년 말에는 피터스가 초역한 전도서가 공인번역위원회역으로 확정되었으나 낱권으로는 출판되지 않았다. 피터스는 1908년 3윌 미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으로 내한하여 의사로서 의료선교에 종사하던 에바 휠드(Eva H. Field, 1868-1932)와 재혼하였고 여기서 두아들 르우벤(Reuben Field, 1908-)과 리처드(Richard Sawyer, 1910-)가 태어났다. 한편 레이놀즈는 이승두를 번역 위원으로 천거하여, 1908년 10월 31일부터 이승두도 번역위원이 되었다. 전주에서 레이놀즈는 서울에 있는 게일과 연락하면서, 전주에서 구약 번역(구역)의 완결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0년 4월 2일 전주분과에서 서울에 있는 대영성서공회 지부 밀러(H. Miller)총무 앞으로 "번역 다 도엿소라"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제 구약 전체의 국역작업이 일단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레이놀즈에 의하면,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국역을 끝내는 데는 1904년 10월 17일부터 1910년 4월 2일 까지 5년 5개월 16일이 걸린 셈이다. 이제 신약과 구약을 합하여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전서가 1911년 3월 9일 구약 2권, 신약 1권으로 출간됨으로써, 그 역사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한글 구역 성경전서이다(구약 구역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 조회한다: 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 구약의 말씀과 현실, 한국성서학연구소, 1996, 특히26쪽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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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彼得)와 한글 구약성경 번역 이야기 ② | 성서한국, 54권3호(2008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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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3월에 구역 성경전서가 출판되면서 공인번역위원회는 개역위원회(The Board of Revisers)로 발전적 해체를 했다. 1912년 1월에는 개역위원회에 대영성서공회가 정한 ‘성경 번역, 개역, 편집에 관한 지침과 규정’을 담은 소책자가 전달되었다(Rules for the guidance of translators, revisers, & editors, working in connection with the bfbs). 그 결과 1921년 가을에 개역 본문의 성과를 측정해 보기 위해 창세기를 개역본문으로 출판하여 각계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그 결과 게일이 주도한 개역 본문은 대영성서공회의 규칙서는 따르기보다는 게일의 번역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일의 번역원칙은 요컨대, “문자적인 직역보다는 자유스러운 의역(free, rather than literal)"을 주장하는 것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게일의 원칙을 따르는 창세기 개역을 ”단축된 풀이역(abbreviated paraphrases)"이라고 규정했다. 게일이 주도하는 구약개역은 “매우 중요한 단어와 개념들”을 자주 생략했기 때문에 이점을 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다(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구약의 말씀과 현실, 한국성서학연구소, 1996, 36쪽 이하 참조). 1921년부터 개역위원회는 신약개역소위원회와 구약개역소위원회(이하 구개위)로 나뉘어 작업을 하게 된다. 구약개역 작업은 대영성서공회 규칙서에 따라 방향재조정 되었고, 게일은 자신의 번역원칙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기 때문에 1922년 개역위원을 사임했다. 게일은 그가 주도적으로 작업한 구약개역 원고를 1924년 3월 상임성서실행위원회 앞으로 제출했다(게일은 자신의 번역원칙을 굽히지 않고, 1925년 기독교창문사를 통해 자신과 이원모의 이름으로 신역 신구약전서를 출판했다). 1922년 9월 민휴는 방향 재조정된 구개위의 사정을 영국 성서공회 본부 킬구어(R. Kilgour) 총무에게 보고하고, 한국의 구개위가 요구하는 옥스퍼드 히브리어 사전과 긴스버그(Christian D. Ginsburg)가 대영성서공회를 위해 편집한 히브리어 구약 원전 성경을 3권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Christian D. Ginsburg, The Old Testament, diligently revised according to the Massorah and the early editions, with the various readings from manuscripts and the ancient versions, 1908, 1926). 그해 11월에 그에 대한 답신에서 킬구어는 구개위가 대영성서공회 규칙서를 따르게 된 것을 기뻐한다는 뜻을 전하고, 요청한 옥스퍼드 히브리어 사전과 긴스버그가 편집한 대판 히브리어 성경과 3권의 소판 히브리어 성경을 보내니 구개위에 전달해 달라고 편지했다. 이렇게 해서 구개위는 적어도 이때부터 긴스버그 편 히브리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가능한 한 원전에 충실한 직역원칙으로 개역작업을 해 나갔다(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상게서, 40쪽 이하; 동일 필자, “한국어 성경 번역의 역사”, 기독교사상, 1993.2, 30쪽 참조). 상임성서실행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구약 히브리어에 능한 적임자를 찾아 구약개역의 책임을 맡기려고 했다. 여기서 피터스가 적임자로 선택되어 1926년 1월부터 구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피터스는 동년 2월 1일 대영성서공회 규칙서를 수령하였고, 3월 26일에는 구개위의 “평생위원(permanent member)"으로 위촉되었다. 이 때 민휴는 피터스에 관해 킬구어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히브리어 학자로서 그는 한국에서 그 어느 사람보다 훨씬 앞서 있으며 그의 한국어 지식도 매우 탁월합니다.”(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상게서, 43쪽). 1926년에 구약개역 평생위원으로 선출되는 것이 계기가 되어, 피터스 부부는 1927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피터스는 오전과 오후에 번역 일을 하며 원전(the original text)을 앞에 놓고 세심하게 대조하여 개역을 하고 있다고 선교부에 보고했다. 1930년까지 레이놀즈, 베어드, 그리고 피터스 세 사람이 중심이 되고 이원모가 조수가 되어 구약개역 작업이 계속 이루어졌다. 피터스의 아내 에바 휠드가 1932년 7월에 타계했다. 피터스는 1933년 11월부터 1934년 8월까지 미국에 가 있었다. 피터스가 미국에 있는 동안 그가 속해 있던 미북장로회선교부는 재정난을 이유로 피터스를 한국에 재 파송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는데, 당시 63세의 피터스를 결국 다시 한국에 파송한 것은 그가 한국에서 구약개역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휴는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런던에 있는 본부에 미리 알렸다: “구약개역을 위한 핵심 인물로 우리가 피터스를 얻지 못한다면, 개역작업이 곧 끝날 수 있는 희망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상게서, 47쪽). 첫째, 둘째 아내와 사별한 후 1934년 피터스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앤 쿠퍼(Anne Cooper)와 결혼하고 그 해 가을에 같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5년 새해부터 레이놀즈와 피터스가 다시 구약개역에 함께 박차를 가했다. 동년 3월에는 이원모(李源謨)가 개역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여름 내내 레이놀즈, 피터스, 이원모 세 사람은 지리산에 있던 레이놀즈의 별장에 모여 남아있는 구약개역에 전력을 다 했다. 이러한 강행군의 결과로 피터스에 의하면 1936년 3월에 드디어 구약개역작업이 일단 끝이 났다. 1936년 12월에 이 구약 개역 전서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1936년 판 개역 구약전서는 피터스가 본격적으로 개역작업에 관여하기 전에 개역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예컨대, 문체의 통일성과 번역의 정확도 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특히 오경, 수, 삿, 룻, 삼상, 잠, 사, 렘, 합과 단 등이 지적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1936년 판 개역 구약본문을 피터스와 이원모가 맡아서 다시 작업(수정과 필요한 경우 재번역)을 하였으며, 레이놀즈의 승인을 받아 1937년 8월까지 재개정을 마쳤다. 1937년 9월22일 상임성서실행위원회에서는 마침내 신구약 개역위원회의 개역완료 보고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최종 확정된 개역 구약본문이 개역 신약본문과 함께 1938년 9월3일에 개역 성경전서로 출간되었다. 그 동안 구약개역은 1912년에 시작되었지만, 1922년에 방향재조정을 거쳐 새로운 출발을 했으며, 1926년부터 피터스가 “평생위원”자격으로 구개위에 본격적으로 참여함으로써 1937년에 그 완결을 보았고, 1938년에 드디어 한국교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피터스는 그가 1941년 그의 나이 70세에 한국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우리나라 구약 국역사에서 선구자이며 또한 구약 구역에 참여한 일과 함께 특히 개역시대 구약 개역의 주역으로서(1926-1938년에 집중적으로 공헌함)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성경”으로서 강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1938년 판 개역성경의 구약본문을 완결한 장본인이다. 무엇보다 피터스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구약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다. 피터스는 1901년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서 5번 항목에서 “영어 외에 어떤 언어들들 공부했는가?”라는 물음에 자필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었다: “라틴어, 희랍어, 고대 슬라브어, 히브리어, 불어를 공부했으며, 영어, 러시아어, 이디쉬어(yiddish), 독일어, 한국어로 회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이어서 “언어들을 습득하는데 나에게는 어려움이 없다(languages are not difficult for me to acquire.)”고 했다(피터스의 1901년 선교사 지원서:reproduction from original in the collections of the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425 lombard st., phila., pa.). 성경번역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보다 영적인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 원어 지식 및 그와 관련된 어학 능력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 국역사에서 피터스는 어느 선교지 성경번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약번역자로서는 독특하고도 탁월한 자질을 구비하였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개역성경은 특히 구약의 경우 처음부터 히브리어 원전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고, 한문성경이나 영어성경에서 번역한 ‘선교사 역’으로서 오류가 많다는 설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구약 국역사에서 피터스의 역사적인 위치와 그의 국역 활동의 의의를 조명해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른 낭설일 뿐 아니라 무책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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