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막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은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에 파묻혀서 성경을 기록하고, 전수하는 일을 맡았다. 아마도 제사장과는 다르겠지만... 지금으로 치면, 이들이 어떤 사람일까? 성경학자들, 신학교 교수들 이 정도는 될 것이다. 신학을 제대로 하고, 올바로 가르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서기관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지적했다.
(막 12: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막 12: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구약 성경에 달통했던 서기관들은 이사야 선지자 등의 예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 등의 전래와 사상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구약의 선지서의 이야기는 다 옳은 말이고, 실제로 그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기관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육적인 눈말 있을 뿐, 영적인 눈은 감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적인 눈은 감겨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앞에 살아계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가 38~40절 말씀에 나온다. 서기관들의 실제적인 현상에 대해서... 이들은 삶은 물론, 기도까지 타락했다. 철저히 가식적이었다. Coram Deo(하나님 앞에서)를 거쳐서 Coram Mundo(세상 앞에서)로 가야 하는데, 진정항 Coram Mundo도 아닌, 가식적인 Coram Mundo를 Coram Deo 없이 하는 이들로 전락했다.
서기관은 분명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서기관의 노고를 아는가? 필사자의 노고를 아는가? 거룩한 네 글자, adonai를 필사하기 전에, 서기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적기가 너무나도 거룩하고, 송구스러워서 펜을 깨끗이 닦을 뿐 아니라, 목욕까지 하고 나서 거룩한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중세 수도원의 필사자들이 너무 필사를 열심히 한 나머지, 눈이 어두워지고, 등이 굽었던 것처럼, 진짜 서기관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어떻게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한 마디로, Coram Deo가 사라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신스스로도 제대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Coram Deo가 사라진 현실은 표면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럴려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주여, 인도하소서.
반면에, 서기관들과 대조되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막 12: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시기관의 허식을 지적하신 사건과 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사건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이 두 가지 사건은 대조된다. 마가도 아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의도적으로 이 두 사건을 묶어서 배열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사람은 과부이다.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늘 대접받는 서기관들과는 극히 대조되는 한 가난한 과부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과부는 지극히 작은 돈을 헌금했지만, 그것은 이 과부의 모든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양보다 질을 따지는가??...
지극히 작은 양을 헌금으로 드렸던 이 과부를 예수님은 지극히 많은 것을 드렸다고 평가했다. 우리의 평가와 얼마나 다른가?
이 과부...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를 생각하셨다.
과부는 진정으로 Coram Deo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건의 대조로 보면, Coram Deo는 어쩌면, 부한 자들에게보다 가난하고 미련한 자들이 더 쉽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남한보다 북한의 성도들이 더 Coram Deo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나는, 이제 신학도 하고, 사역도 한다. 아직,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이 길로 계속 걸어간다면, Coram Deo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떨어질 나락은 정말 비참하다. 성경에 달통하고, 하나님께도 사랑받는다고 착각하며 육적 Coram Deo가 전부인 양 여겼던 서기관들처럼...
그러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이 서기관의 위치에 서서 가르쳐야 하지만, 과부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Coram Deo하기 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주여, Coram Deo를 통하여, 진정한 Coram Mundo로 나아가는 삶을 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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